[밤]
초능력을 하나 고르라면, 하늘을 날거나 투명인간이 되는 대신 ‘자동 세안’을 택하겠다. 손뼉을 치면 얼굴의 메이크업이 말끔히 사라지는 초능력. 싱글일 때는 퇴근 후에도 화장한 채로 곧잘 있었다. 술 약속이 많았고, 일찍 귀가해도 친구의 ‘나와’라는 문자에 다시 외출했으니까.
요즘은 퇴근하면 바로 집에 간다. 그리고 화장실로 직행. 굳은 비누를 적셔 손부터 씻는다. 엄지와 검지로 눈을 꼬집어 콘택트렌즈를 빼고, 앞이 흐려지면 ‘시력이 나빠졌나’ 잠깐 걱정한다. 치약을 짤 때는 습관적으로 칫솔모를 확인한다. 새 칫솔을 사야지 하면서도 자꾸 잊는다. 양치 다음은 클렌징 오일. 노란 기름으로 눈썹, 눈두덩, 입술을 살살 문지르다가 얼굴 전체를 비빈다. 비비크림과 아이라인이 물감처럼 녹아내리는 걸 보면 뭔가, 희열이 있다. 마지막은 거품 클렌징으로 메이크업의 뿌리 뽑기. 미인들은 편하겠다. 아침저녁으로 그렸다가 지우는 번거로움을 생략할 수 있을 테니.
세안을 마치면 화장대에 앉아 나의 민숭민숭함을 감상하며 수분크림을 바른다. 역시 눈썹이 흐리다. 다시 연하게 긋는다. 입술에도 주황색 틴트를 살짝만.
이제 준비되었다. 출근 준비처럼, 여유로운 밤을 위한 작은 준비도 있다는 것을 당신과 함께 하며 알았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고, TV의 심슨가족을 튼다. 얼마 후 희미한 걸음 소리가 들리면 빵집에서 사온 치킨샌드위치를 꺼낸다. 현관문을 열고 나타난 당신. 우리는 눈을 마주치고 괜히 웃는다. 당신은 내 무릎을 베고 눕는다. 그리고 속삭인다.
“오타쿠.”
심슨 좋아하는 사람 중 오타쿠가 아닌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당신은 피곤에 절어 눈도 똑바로 못 뜨면서 샌드위치를 우적거린다. 이대로 자고 싶다고 하면서. 내가 턱으로 화장실을 가리키면 간신히 몸을 일으킨다. 수건을 꺼내다가 꼭 한마디 덧붙인다.
“왜 집에서 눈썹을 그리고 있어? 오늘도 또 저러네, 이상한 아줌마네.”
“당신 눈 지켜주려고.”
내 대답에 당신은 갸웃하며 욕실 문을 닫는다. 대머리에다가 스킨조차 안 바르는 당신이라 샤워, 샴푸, 세안을 한 번에 하겠지. 미인보다 더욱 편하겠다. 소파에 누워 당신의 샤워 소리를 듣는다. 눈이 감긴다. 낮에 회사에서 일하는 내내 지금의 평화를 기다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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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2015 • 4 minutes, 1 second
2.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겠죠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겠죠]
남편은 강아지 같습니다. 내가 퇴근하고 집에 들어서면, 하루 종일 주인만 기다린 강아지처럼 헐레벌떡 달려와 가방을 들어줍니다. 진짜 반려견 미미는 소파 팔걸이에 턱을 괴고 엎드려 우리를 시큰둥하게 구경하고요.
지난달에는 남편이 나를 보고 반가워 어쩔 줄 몰라 할 때마다 따귀라도 때려주고 싶었습니다. 스트레스 때문이었어요. 물론 실제로 때리진 않았으니 오해 마세요. 억지로라도 웃으며 그의 장단에 맞췄습니다.
스트레스의 원인은 회사였습니다. 재작년에 미미랑 똑같이 거실 소파에만 붙어있는 남편이 숨 막혀 도피성 취업을 했거든요. 집에 있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려 얼마나 야근했는지 모릅니다. 집을 벗어나 갈 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월급까지 받으니 참으로 벅찼습니다. 그렇다고 가정에 소홀하지도 않았어요. 저는 타고난 체력이 좋거든요. 새벽마다 용수철처럼 일어나 식탁에 남편의 세 끼 식사를, 바닥에 미미의 사료를 떨궈놓고 출근했지요. 그렇습니다. 내 몸과 마음은 90% 이상 회사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내가 원했던 상황이었으니 여직원들과 점심을 먹다가 자랑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사무실에서 상주하는 사람이라고, 집에는 잠깐 밥이나 차려주러 가는, 출장 요리사나 마찬가지라고요.
며칠 후 사장님이 면담을 요청했어요. 심각한 얼굴로 “자네, 회사에서 거주하고 있다고 들었네” 하더군요. 칭찬인 줄 알고 “과찬이십니다” 했지만 사장님의 두 뺨이 팽팽해지더니 불같이 화를 냈어요. 내게 당신 같은 인간은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거냐고 윽박 질렀습니다. 어리둥절했습니다. 놀라면 말 한 마디 못하고 울어버리는 습관이 있어 그대로 눈물을 쏟으며 조퇴했습니다. 집에는 가기 싫고, 스마트폰으로 이메일을 기다렸어요. 회사의 누군가가 나에게 영문을 말해주기를. 그날따라 메일함이 잠잠했습니다. 저는 매일 점심을 함께 먹는 동생에게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동생은 제가 의심받고 있다고 하더군요. 회사의 두루마리 휴지, 치약, 포스트잇, 믹스커피를 훔치는 좀도둑이 있는데 범인을 못 찾아 몇 달째 운영비만 숭덩숭덩 빠져나갔다고 했어요. 그게 저하고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내 회사에 그런 사정이 있었다니 마음 아팠습니다. 그런데 동생 말로는 제가 그 좀도둑으로 밝혀졌다고 합니다. 누가 저를 조사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밝혀졌다는 표현이 조금 이상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훔칠 의도는 없었더라도 회사에 평균 이상으로 머물면서 소변도 자주 보고, 양치도 서너 번씩 하고, 커피도 자주 마셔서 회사에 손해를 끼쳤을지 모른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좀도둑이 따로 있는데 내가 누명을 쓴 건지, 아니면 내가 물품을 많이 써버려서 허구의 좀도둑 캐릭터가 생긴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회사를 이해하기로 했습니다. 과유불급을 가슴에 새기고 퇴사했지요.
지금도 회사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회사에서 나를 오해할 이유가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물품을 낭비하는 것 같다고 중간에 귀띔해주었더라면 집에서 휴지나 커피를 챙겨왔겠지만, 재직 중에는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 했습니다.
남편에게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습니다. 나의 퇴사를 알면 기뻐서 벼룩처럼 날뛸 텐데요. 손을 붙잡고 “다시는 취직하지 말아요”했겠지요. 아기나 만들자고 할 겁니다. 이래서 부잣집 백수에게 시집오는 게 아니었는데. 누굴 탓하겠습니까. 욕망이라고는 식욕 수면욕 성욕밖에 없는 남자를 배경만 보고 선택한 내가 천치였습니다.
요즘은 저도 많이 진정되었어요. 다행히 다시 취업됐거든요. 예전 회사에서는 전공을 살려 재무회계 담당자로 일했는데, 지금은 샌드위치 공장과 카레집에서 일합니다.
아침 다섯 시부터 아홉시까지 부지런히 샌드위치를 만들면 운전사가 트럭 가득 샌드위치를 싣고 카페와 편의점에 납품하러 갑니다. 신선한 양상추와 계란, 햄을 품은 식빵들을 랩으로 꾹꾹 포장하다가 오늘도 누군가 이걸 먹고 열심히 일할 것을 상상하면, 눈물이 핑 돌 때도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한 간편식을 만드는 게 이렇게 보람찰 줄은 몰랐어요. 역시 사람은 무엇이든 경험해야 아는 법인가 봅니다. 샌드위치 공장에서 퇴근한 후에는 집에 들어가 남편의 아침, 점심, 저녁을 식탁 위 그릇 세 개에 덜어놓고 미미의 사료는 식탁 밑에 두고 다시 집을 나섭니다. 그래 봤자 오전이어서 남편과 미미는 내가 왔다간 줄도 모릅니다. 자느라 바쁘지요. 저는 살금살금 현관문을 닫고 삼성역으로 갑니다. 역사 자판기에서 마운틴듀를 뽑아 공장에서 손수 만든 샌드위치와 함께 먹어요. 매일 먹는데도 물리지 않고 맛이 좋습니다.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식사하는 것은 다소 추접한 것 같아 다 먹을 때까지는 지하철을 몇 대고 보내버립니다. 벤치에 앉아 지하철 사람들의 표정을 구경하며 꼭꼭 씹어먹는 것을 좋아해요. 천천히 먹다가 지하철을 아홉 대나 보낸 적도 있지요. 이 시간이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시간입니다.
식사를 마치면 2호선 순환 열차를 탑니다. 휴대폰으로 오후 세시에 알람을 맞추고 낮잠을 잡니다. 그때가 보통 오전 11시 30분쯤인데 그 시간이면 사람이 없거든요, 맨 끝 칸에 타면 언제라도 앉을 수 있어요. 종아리 뒷부분에 따뜻한 히터 바람이 닿으면 숙면도 순식간입니다. 알람에 깨면, 안성맞춤으로 제가 일할 곳 근처의 지하철역이라서 곧장 내려 택시를 타고 두 번째 일터로 가면 됩니다.
오후에는 신촌의 카레집에서 일해요. 원래 달콤한 카레는 선호하지 않는데, 이곳의 카레는 설탕 단 맛이 아니라 파인애플과 꿀의 단 맛이어서 나쁘지 않습니다. 주인이 남은 카레를 싸주면 야식으로 식빵을 찍어 먹거나, 소면을 말아먹어도 그만이고요.
한 회사에 열과 성을 바치다가 과유불급을으로 해고되지 않게, 직장을 두 곳으로 잡았습니다. 네, 제 의도였어요. 하지만 재무회계팀에서 일하다가 왜 요리와 서빙에 뛰어들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본능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그 본능이 만들어진 데에도 이유가 있을 텐데.
어쩌면 예전 회사에서 일하면서 남편과 미미의 요리를 빠른 속도로 챙기는 것에 재미 들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회사 일에 노련해지는 것과 비례해 출장 요리사로서의 능력이 향상되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번에는, 몸을 쓰는 일을 하고 싶기도 했고요. 지금 든 생각인데 몸 쓰는 일을 하고 싶은 것은, 집에 몸을 안 쓰는 존재들만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남편과 미미에 대한 반발심일 수도 있겠습니다.
생각을 하다 보면, 참으로 끝이 없습니다. 인생도 끝이 있어 흥미로운 것처럼, 생각에도 끝이 있어야 흥미롭겠죠.
남편에 대한 생각도, 미미에 대한 생각도, 저들은 왜 저렇게 세로형으로 서있지 못하고 가로형으로 누워만 있을까에 대한 생각도, 끝을 낼 수 있습니다. 샌드위치를 만들고 카레를 서빙하다 보면 말이에요. 퇴근길에는 다시금 그쳤던 생각이 소나기처럼 내리지만, 그건 그야말로 날씨와 같아 제가 조절할 수 없습니다. 가장 자주 하는 생각은 ‘왜 부잣집 며느리가 되고도 스스로에게 쉴 틈을 주지 않는가’에요. 하지만 이거야말로 이유가 명확해서, 다시 쉽게 생각을 끝낼 수 있지요.
가난이 지겨워 이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명확했습니다. 처음 몇 달은 행복했어요. 결혼하길 잘했다, 싶었고요.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반려견과 똑같이 행동하는 남편을 보면서 마음이 먼저 가출했어요. 강아지들 말고 사람들 사이에서 생활하고 싶어졌습니다. 사실 저는 고양이를 키우던 사람이라 강아지의 보편적 생활습관을 그리 좋아하지도 않고요. 강아지도 귀엽긴 하지만, 그것도 강아지 나름이겠지요.
어느덧 한밤중입니다. 남편과 미미가 잠든 것을 확인했습니다. 카레에 밥을 비벼 먹고 식기세척기를 돌립니다. 남편이 깰까 봐 숨죽여 설거지하는 대신 이렇게 비싼 무소음의 기계로 접시를 닦을 수 있다니, 이럴 때 부잣집 며느리라는 게 실감 납니다.
오늘 밤은 이런 생각도 드네요. 10년 후 제가 어디서 일하고 있을지에 대해서요. 아이가 있을까요? 미미는 살아있을까요? 전혀 감이 오지 않습니다. 내가 남편과 함께일지, 남편이 살아있을지, 내가 살아있을지도 감이 안 옵니다. 미래를 알 수 없는 것에도 다 이유가 있겠지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생각해야겠습니다. 어서 아침이 오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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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2015 • 11 minutes, 30 seconds
1.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
중국 여행하는 꿈을 꾸고 있었는데, 화장실에 가고 싶은 기분이 강해지는 바람에 중국 만두를 먹기 직전 잠에서 깼다. 아쉬워라. 눈 뜨자마자 보인 건 찐만두처럼 부푼 얼굴. 인상을 쓰고 드르렁드르렁 코를 고는 이 사람. 아휴, 어쩜 이렇게 못생겼을까? 난 참 비위도 좋지. 잠자는 그의 면전에 손가락질하며 “후후후” 비웃어주고 냉큼 오줌을 싸러 갔다. 난방이 잘 되는 요즘 아파트에서도 자다가 화장실 가기란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닌데, 옛날 우리 조상님들은 집 밖의 화장실까지 가기 얼마나 성가셨을까. 나라도 요강을 썼을 거야. 가벼워진 방광으로 돌아와 이불을 덮다가, 그의 양팔을 억지로 벌려 그 사이에 옴짝하게 안겼다. 그는 “으으” 거부하듯 싫은 소리를 내면서 헤드락처럼 성의 없이 안아주었다. 잠결에도 ‘귀찮아 죽겠네, 해주면 될 거 아니야’하는 태도를 유지한다. 아유, 한결같은 사람.
“어머, 눈 온다!”
“으으?”
“어머 자기 깼구나? 아니야, 자. 자.”
발치의 창문 밖으로 뽀얀 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이 좋아라.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신랑의 귀여움이 돋보이는 크리스마스가.
그를 처음 봤을 때 앗, 저렇게 못생긴 남자는 어떻게 장가 가지? 하는 걱정부터 들었다. 걱정은 의외로 쉽게 풀렸다. 내가 결혼해주었으니까. 그는 예나 지금이나, 흑백 사진으로 유명한 포토그래퍼다. 그리고 난 3년 전만 해도 그의 작품을 간간이 스크랩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진을 찍는 포토그래퍼는 어떻게 생겼을까? 어떤 옷을 입고 어떤 포즈로 사진을 찍을까. 네이버에 이름을 검색해 봐도 그의 포트폴리오만 나올 뿐, 얼굴은 베일에 가려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신랑이 똑똑했던 것이다. 가릴 건 가려야지. 아무튼 내가 근무하는 홍보팀에서 어느 날 우리 회사의 광고 사진을 멋들어지게 찍자는 의견이 나왔고, 나는 별 고민 없이 그를 섭외했다. 회의실에서 처음 인사하며 그의 실물에 놀랐지만 (심지어 옷도 몇 년 전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바람막이를 입고 있었다.) 그래도 사진 퀄리티는 좋을 테니, 담당자로서 열심히 일해보자 의욕을 다졌다. 열심히 일하는 나와 열심히 촬영하는 그, 우리 사이에 동료애가 싹텄다. 마음 맞는 동료들이 그러하듯 맥주도 몇 번 마셨고, 그래, 이 정도로 함께 열심히 살면 인생도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거야 싶어 동맹을 맺듯 연애했다.
처음으로 자취방에 그를 초대했던 2년 전 크리스마스, 빨간색 원피스를 입은 나는 소파에서 안절부절하다가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었다. 초록색 카디건을 입은 그가 무뚝뚝한 얼굴로 화분을 들고 서있었다. “내가 이 집에 온 몇 번째 남자죠?”
저런 뻔한 농담을 안 하면 더 좋아해 줄 텐데, 생각하면서도 난 부끄러운 척 얌전히 웃었다.
그날은 엄마에게 얻은 전복을 굽고, 차돌박이와 감자를 넣어 된장찌개를 끓였다. 매운 것을 못 먹는 사람이니 고추는 생략. 그렇다. 찌개에 청양고추 넣는 것을 포기할 만큼, 나는 그를 위해 입맛까지 희생하고 있었다. 야수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내가 미녀가 아니어서 미녀와 야수는 아니지만, 여자와 야수 정도는 되었다. 그는 도무지 호감 가는 인상이 아니었고, 그렇다면 옷을 잘 입거나 다정한 맛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나의 기똥찬 찌개를 먹은 후에도 맛있다는 칭찬조차 제대로 안 하는 남자였다. 기껏해야 “코오오”하는 감탄사를 조그맣게 들려줄 뿐. 그건 코 고는 소리에 가까웠다.
하지만, 다들 알 것이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의 장점은 전부 다 대단해 보이고, 그의 단점은 모조리 귀여워 보인다는 것을. 고로 그가 사진을 촬영할 때면 언제고 대단해 보였고, 그 외의 시간에는 언제고 귀여워 보였다. 내가 그를 귀여워하는 만큼 그가 나를 귀여워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귀여워하니까 밤을 꼴딱 새운 날 아침에도 나를 보러 왔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튼 2년 전 크리스마스에,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는 그가 해주었다. 싱크대가 낮아 다리를 시옷자로 쩍 벌리고 설거지를 하는 모습에 마음이 훈훈해졌다. 우리는 소형 빔 프로젝터를 이용해 천장에 영화를 쏘았다. 요즘이야, 그가 눕자마자 그의 허리를 쿠션 삼아 다리를 척 걸쳐두지만, 그때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침대에 누우면 에로틱해질 수 있으니 딱딱한 거실 바닥에 누워 천장의 영화를 감상했다. 그 사람의 연애 공백기가 길었던 것에 비해 나는 이래저래 넉넉하게 연애해봤지만, 어쩌면 이 사람하고는 결혼할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에 오히려 모든 스킨십을 천천히, 아끼고 싶었다. 더불어 첫 크리스마스인 만큼 섹기하기보다 순수하고 싶었고. 그러려면 빔을 천장에 쏘지 말고 벽에 쏠걸, 후회하는데 그가 내 어깨에 자신의 어깨를 붙였다. 입을 맞출 듯한 공기. 난 벌떡 일어나 냉동고에서 하드바 두 개를 꺼냈다. 나란히 바밤바를 우적대며 키스를 미뤘다. 물론, 그때도 이미 그와 몇 번 키스를 해본 상태였지만, 뭐 그리고 사실 잠자리도 한 번 한 상태였지만, 자취방에서 저질러버리면 뭔가 엄청나게 불탈 것만 같았다. 솔직히 자취방에 초대한 첫 남자이기도 했다. 아무튼 나는 상대방과 대략 어느 시기에 어느 수위의 스킨십에 이르는 게 좋겠다는 계산을 하는 편이었는데, 그날은 무조건 순결한, 알퐁스 도데 스타일의 밤을 보내고 싶어 속옷조차 새하얀 것을 입고 있었다. 그럴 거면 집에 초대하질 마! 라고 남자들은 충고하고 싶겠지. 후후훗. 하지만 그렇게 자취방에 나란히 누워서도 아무 일 없었던 순진한 추억은 연애 초기가 아니면 만들기 어렵다. 그런 추억이 있다면 부부가 되어서 평생 두고두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 싶었다. 그 정도로, 나도 모르게 야수와의 미래를 꿈꾸었다.
영화는 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빙판에 눕자, 마치 우리의 모습이 천장에 비친 듯했다. 그가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자기, 스킨십은 새해에 새 마음으로 시작합시다, 오늘은 아이처럼 순수하게 있고 싶어요”라고 말할까 고민했는데, 그가 긴장한 목소리로 먼저 말했다.
“오늘 우리 커플룩이네요.”
나의 빨간 원피스, 그의 연두색 카디건.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귀여운 크리스마스 커플룩. 그는 덧붙였다.
“우리 어떻게 원피스랑 카디건 색을 똑같은 것으로 골랐을까?”
그리고 흐뭇한 미소를 짓더니 다시 영화에 집중했다.
나는 두 가지에 놀랐다. 그가 드디어 미소를 지었다는 것과, 그의 발언에 대해. 그의 발언 때문에, 영화가 끝날 때까지 왜 빨간색과 녹색이 같은 색일까 의아해했다. 영화를 보기 위해 조명을 끄긴 했지만 식사 시간에는 환했으니 내 옷을 봤을 텐데. 아니면 내가 오늘 빨간색이라고 착각하고 녹색 옷을 입었나.
“우리가 같은 색 옷을 입었다구요?”라고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그날 그가 처음으로 내 앞에서 방심한 듯 행복한 웃음을 흘려서 나는 질문을 스킵하고, 마주 웃었다.
일주일 정도 후. 새해를 맞아 이번엔 그의 집에 떡국을 먹으러 놀러 가던 길, 횡단보도에서 파란 불을 기다리다가 퍼뜩 떠올렸다.
“……적록색약?”
명암 대비가 확실한 흑백 사진을 잘 찍는 포토그래퍼. 스타일리스트가 비서처럼 붙어 다니는 것도 어쩌면 색상을 확실하게 설명해줄 사람이 필요해서일까. 운전면허도 그래서 없는 걸까? 신호등의 빨간불과 초록불을 구별하지 못 해서. 그럼 이 사람은 횡단보도를 건널 때에도 색 대신 다른 사람들이 철새처럼 무리 지어 건너는 것을 따라 건너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가슴이 꽉 찰 정도로 만족스러운 감정이 솟아올랐다. 그를 챙겨줄 수 있는 핑계가 생겼다.
그 해 여름 예식장을 잡을 때까지도 그는 내게 아무 말하지 않았다. 실은 지금까지도. 나는 오른쪽과 왼쪽을 헷갈리는 어린아이를 놀리듯, 종종 빨간색이나 초록색을 가리키며 “어머 여보 이건 무슨 색일까?”하고 물었다. 그럼 그는 우물쭈물하다가 얼굴이 벌게져서 툴툴 거렸다.
“알면서 뭘 물어?”
한 번은 시어머니 댁에 인사드리러 가서 그가 담배 피우러 나간 틈을 타 슬쩍 여쭤봤다.
“이이가 색약인 거 어머니는 언제 아셨어요?”
나에게는 사랑스러운 그의 단점이 어머니에게는 귀한 자식의 가슴 아픈 단점인지 놀란 얼굴로 말씀하셨다.
“어떻게 알았니?”
“어쩌다 알았어요.”
“우리도 저 녀석 고3 때 처음 알았지. 색약이어서 미술대학에서 입학 자격을 박탈 당했거든. 녀석도 그제야 본인이 색약인 걸 알고 어찌나 충격을 받던지. 하도 울어서 시력을 잃겠다고 걱정했을 정도였다니까.”
나는 남편의 고등학교 졸업 사진을 떠올렸다. 보들보들한 아기 얼굴로 슬피 울었구나. 장난쳐서 미안해, 여보.
창틀에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여보.”
“으응.”
“자?”
“으응. 나 많이 자야 돼.”
“왜?”
“다음 주에 촬영이 많아.”
“그렇구나.”
나는 남편의 눈꺼풀을 엄지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여보, 빨간색하고 초록색을 구별 못해도 이렇게 훌륭한 포토그래퍼가 되었네. 나한테 장가도 오고. 당신 참 성공했어.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오랜만에 커플룩이나 입을까?
눈꺼풀에 입을 맞추자 그는 울상이 되어 돌아누웠다.
“으으. 왜 이렇게 날 힘들게 하는 거야.”
“등 돌리지 마아 마아. 마주 보고 자야지.”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돌아누워 나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창밖의 눈송이가 굵어진다. 저 눈은 하얀색, 저 하늘은 짙은 회색. 신랑의 눈에도 나의 눈에도 똑같은 풍경이다. 엇. 그러고 보니 오늘은 늦잠 잘 수 있는 토요일이었지? 한 잠 더 자고 일어나 청양고추를 스킵한 된장찌개를 끓여야지. 그럼 그의 “코오오”하는 작은 감탄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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